그들의 넉넉함으로
성탄 홀리몹 후기
글쓴이: 김용삼 목사
이번 성탄은 그 어느 때보다
참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가정 살리기 프로젝트가
의미있는 열매를 맺게 되었고
크리스찬들이 연합는 성탄 홀리몹이
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성탄전야에 서울역 지하도에서
예배를 드리고 선물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탄은 하나님께서
교회들의 연합에 대한 마음을 주셔서
성탄 홀리몹을 생각하게 되었고
많은 분들이 교단 교파를 초월하여
동참해 주셨습니다.
또 좋았던 것은 소망을 찾는이 성도분들이 처음으로
성탄전야를 오붓하게 보냈다는 것입니다.
연약분들의 공동체이지만
늘 세상 속에서 섬기는 개념으로 예배를
드리다 우리끼리 전야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가졌고
서로 축복하며
주님오심을 기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0년이상을 서울역 지하도 성탄예배만 드리다
우리끼리(?) 드리니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25일 오후 3시 한스밴드 자매의
섹소폰 연주와 함께 시작된 성탄 홀리몹은
성탄찬양과 아이들의 찬양 및 율동
녹음된 메시지 전달등
세상속에서 드리는
성탄예배로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술에 취해 예배를 방해하던
형제가 메시지가 선포될 즈음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성탄의 의미가
관념이 아닌 실존으로 다가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이 다스리는 자리였고
주인된 자리였습니다.
어느 교회나 개인이 주도하거나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찬양인도자도 사회자도 없었습니다.
나눔의 시간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서울역에 노숙하는 분들은
대부분 저와 안면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날 성탄 특수(?)을 맞아
그곳에 모여든 분들
(이분들은 노숙하는 분들이 아닙니다)께서
질서를 지키지 않고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제 눈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사실 노숙하는 분들은 줄를 서고
질서를 지키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 안에 나름의 질서가 있고 룰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숙하는 분들은 대부분 욕심을 심하게 부리지 않습니다.
사실 노숙의 배경에는
모질지 못한 삶도 작용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수(?)을 맞아 오신 분들의 우악스런 힘에
노숙하는 분들이 밀리고 나뒹굴기도 했습니다.
혹시 어제 마음이 상한 분이 있다면 푸십시오.
그리고 노숙하는 분들에게 편견을 가지지 말아주세요.
오늘도 서울역 지하도를 찾았습니다.
어제 나누지 못한 선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다행이 특수를 노린 그분들은
성탄이 지나자 모두 사라지셨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주님의 사랑입니다.
한 분 한 분 손을 잡아 드리고 마음으로 기도해 드리고
손톱을 깍아 드리고 면도를 해 드리며
복음을 전하는 사이에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음이 나누어지는 자리에
지하도에 있던 분들 10여분이
내 영혼이 은총입어를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물질은 사람들의
마음을 거칠게 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나누는 자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한 성탄 홀리몹은
마음이 나누어진 자리였습니다.
김용삼 목사님으로부터 오던 메일이
2015년 7월부터 끊겼다.
궁금해서 홈피에 들어가서 글을 읽어보는데,
언젠가 나도 참여했던
성탄절 홀리몹 행사에
관한 후기 글이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저 자리에 나는
친정 아버지와 함께 참여했었다.
떡집에서 시루떡을 맞춰서
구르마에 넣어 아버지와 함께 끌고 갔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도 있고,
믿지 않는 것처럼 말 할때도 있다.
그런 아버지가
서울역 광장에서 찬송을 하는데,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숙연한 표정을 지어서
나도 숙연해졌었다.
참 좋았다.
행사가 끝나고 떡을 나눠줄려고
구르마 덮개를 열자,
어디서 떡냄새를 맡았는지,
노숙자들이 한꺼번에 몇십명이 몰려들어
아버지와 나를 삽시간에 에워쌌었다.
밀치고 밀리는 바람에,
아버지와 나는 순간적으로
서로를 와락 껴안고, 꼭 붙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다칠까봐
아버지는 내가 다칠까봐
마주서서 껴안고 있던
잠깐의 시간,
하늘은 맑았고
찬송은 대기속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노숙자 중 한분이 질서를 지키라고
소리쳐서 상황정리가 되어
떡을 나눠주었는데...
돌아보면 참 따뜻하고 좋았던 시간이었다.
그 전 해에는 내 혼자 갔었다.
모두 둘러서서 찬송을 부르던 시간,
옆에 서 있던 노숙자가
하늘을 가리키며,
예수님이 저곳에 있어요.
이곳을 지켜보고 있어요.
해서,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예수님은 그 분의 마음 속에도 계실거라고 여긴다.
노숙자 중엔 어둡고
거칠어 보이는 이들도 있지만,
굉장히 맑고 단순해 보이는 이들도 있다.
예수님 이름을 말했던 이는 후자였던 것 같다.
그때 잠깐이었지만,
나는 저분들을 통해 많은 걸 얻었다.
그 분들을 통해 내 영혼이 씻겨져
맑고 투명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체 장애인 목욕봉사를 갔을 때도 그랬다.
내가 목욕봉사를 한게 아니라,
그들이 내 영혼을 씻겨주는 봉사를 했고,
나는 그들로부터 영혼의 목욕 봉사를 받은 기분이었다.
사람 중에
내 영혼을 씻겨주는 사람은
그들 밖에 없었다.
오직 그들만이 더러운 내 영혼을 씻겨주었다.
설교를 듣거나 기도회에서도 느낄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적인 씻김이다.
목욕을 끝내고
다과를 앞에 두고 둘러앉아 있는데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내게 강같은 평화라는 복음송이 흘러나와
다같이 부르게 된,
그들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했던 시간.
나는 음치라서 노래를 안하는데,
거침없이 복음송이 나왔던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분명히 예수님을 느꼈다.
나는 그들이 부유한자라고 여긴다.
예수님을 소유한 자보다
더 부유한 자가 어디 있을까?
그들한테만 있는 부유함,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부유함을,
그들로부터 나눠받는
그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그때, 그 시절, 그 시간들처럼
그들이 가진 부유함을 나눠받아
맑고 정결해지고 싶다.
간절하다.
그런데 지금도 내가 그때처럼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