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의 미소를 신비의 미소라고 한다.
보는 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미술비평가들이
신비의 미소라고 명한 후 신비의 미소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내겐 단아해보인다.
언젠가는 못돼 보였고,
언젠가는 평온해 보였다.
그런데 !!
세상 만물,
모나리자의 미소 같지 않은게 있을까?
무엇이든 내 안에서 나와
대상에 투영되었다가 다시 내 안으로 돌아온다.
대상을 보았다고 여기지만,
실상 내 눈에 들어오는건,
대상이 아니라 내 마음, 즉 바로 자신이다.
대체로 그렇다.
내가 보는건 대상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대상에 투영된 내 마음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슬플 때 보면 세상 만사 다 슬프게 보이고,
기쁠 때 보면 세상 만사 다 기쁘게 보이고,
욕망의 눈으로 보면 모든게 다 욕망과 관계있어 보이고,
건강에 묶여 있으면 모든걸 건강에 초점을 두고 보게 되고,
남을 속이거나 시기하는 자는 상대도 그렇게 보이고,
사랑의 눈으로 보면 세상이 다 사랑으로 가득차 보이고,
대체로 그렇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이 보는 것이 정확한지 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
마음과 눈을 덮고 있는 껍질을 벗으면,
우리 눈 앞에 있는 대상을 정확하게 볼 수 있을까?
내 마음이 투영되지 않은,
온전한 대상, 대상 자체를...볼 수 있을까?
나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우리는 자기를 벗어날 수가 없다.
간혹, 그럴 때가 있긴 하지만,
그럴 때가 자신을 완전히 벗어난건지 아닌건지도 알 수가 없다.
<< 예수님만이 정확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살아 있으면 부정확할 수밖에 없고,
내가 완전히 죽기는 불가능하기에 참 어려운 일이다. >>
대상을 본다는 건,
대상이 우리의 시선을 통과했다는 것이고,
우리의 시선을 통과했다는건,
우리 각자의 마음이나 생각을 담은 시선의
거름 장치에 의해 대상이
필터링 당했다는 거다.
마음과 생각이 있는 존재는
시선의 거름장치를 제거할 수 없기에
대상을 정확하게 볼래야 볼 수가 없다.
혼자서 본게 아니라
두세명 혹은 한무리 한 집단이 똑같이 봤다고 해서,
똑같이 봤다는 것 때문에 정확히 봤다고 할 수 있을까?
무리는 무리 특유의 마음이나 사고가 있고,
집단은 집단 특유의 관념이나 신념이 있다.
무리의 사고는 무리의 시선이 되고,
집단의 관념이나 신념은 집단의 시선이 되어,
그 시선으로 대상을 보게 된다.
때문에,
똑같이 봤다고 해서
정확하게 봤다고 할 수도 없다.
끼리끼리 모여서,
그 끼리의 시선으로 보는데 어떻게 정확할수 있겠는가?
어렵다.
횡설수설 하고 있는것 같은데,
하여튼간에!
정치권이 패스트트랙으로 난장판이 된 문제로,
네티즌들이 좌우로 나눠 댓글 공방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같은 사안을 봐도 이렇게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매번 놀라긴 하지만. 음.
한쪽은 패스트트랙이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거라며 저항하는데,
다른 한쪽은 조모일보와 장모사건과 김학x사건 등을 덮기 위해,
문제도 없는 패스트트랙을 문제 삼아 시끄럽게 하는 거라고 욕을 해댄다.
30대 젊은 엄마들의 카페에서 욕을 한다고 하는데,
그들에겐 그렇게 보이나보다.
이렇다,
똑같은 것을 보는데도,
우리는 이렇게 다르게 본다.
나도 나의 마음의 시선이 있다.
내 마음의 시선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든다.
나도 그렇다.
알지만 그렇게 된다.
내 안에 내가 가득차 있으면 점점 더 그렇게 보이고,
정치의 문제일 경우 적대감이 커질 수록 그런 증상은 악화된다.
어렵다.
때문에 가끔 내가 바르게 보고 있는걸까
의심해보며 고민해 볼 때가 있다.
내가 취한 정보의 정확성도 의심해보고,
내 감정이 개입되진 않았는지 골똘히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말씀에서 찾아보려고도 하고,
배후에 있는 영을 파악해보려고도 해보는데,
그래도 어렵다.
내 마음과 사고가 이미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참 어렵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간혹 마귀가 장난을 하여 시야를 가려버릴 때가 있다.
이때 분별을 하기가 쉽지 않다.
실수를 할만큼 한 후 시간이 지나서야 분별이 될 때가 있다.
참 어렵다.
바울은 에베소서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 에베소서 6장 10~20절 -
마귀의 장난을 적지 않게 경험해봤다.
질 때도 있었고, 분별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아주 많았다.
바울은,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한다.
예수님을 믿으나,
싸움이 격렬해지면 믿음의 방패를 잃어버리기 쉽고,
성령의 검인 말씀이 생각나기도 쉽지 않다는 걸 경험한다.
그러나,
그리할지라도 예수님과 하나된 이들은
이기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고 계시니깐.
싸우는 것도,
넘어지는 것도 놀이라고 여기고
즐기듯 지나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주께서 일하신다.
내 눈을 가리는
내 마음의 껍질을 벗는 과정도
욕하고 울고 웃고 떠들며.
잔치하듯 지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땅을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다.
고통의 날들도 세월이 흐르면 그리울 수 있다는걸
느껴본 적이 있기에,
모든 것이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또 까먹지만,
감사를 또 잃어버리지만.
이게 나임을,
이게 나라는 인간임을.
주님,
내 눈에서 나라는 껍질을 벗겨 주옵소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고 가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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