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문화 예술 속에서

우리는 마땅히 순교해야 한다

다니엘1 2019. 12. 27. 16:58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순교자라는 제목의 소설을 중간쯤까지 읽다가 


몸살이 나서 중단했었다.

이즈음 소설 속 인물이 떠올라 


끝까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순교...

...순교자...


예수님을 믿는 이로서, 

참 생각이 많아지는 단어다.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리니


- 요한계시록 20장 4절 - 


위의 말씀에서 


-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이 


바로 순교를 한 

영혼들이 아닌가 싶다. 


순교를 한 영혼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한다고 한다. 


요한 계시록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분분한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일부러 말씀 해석에 관한 글은 

눈으로 한번 쭉, 


가볍게 훑어만 볼 뿐 

자세히 읽지 않는다. 


내가 직접 깨우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눈으로 가볍게 훑어보는건, 

내가 말씀을 통해 깨우친 바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이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인데,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말씀의 경우 

아직 나는 내가 깨달은 바와 


똑같이 기술한 글을 보지 못했다. 


내가 성경을 보는 눈은, 

바로 현재!


 말씀이 내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현재 내게 주는 바에 주목한다. 


-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은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한다-


라는 부분을 통해 깨우친 바를 

소설 순교자를 통해 기술하려 하는데, 


순전히 나, 

개인적인 깨달음일 뿐임으로,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내가 다른 이들의 글을 가볍게 읽듯이 


가볍게 읽고 지나갔으면 좋겠다. 


소설 순교자는, 

6.25 전쟁 때 평양 시내의 


목사 12명이 순교를 당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물론 실제의 사건이 아니라 소설속 사건이다. 


평양 시내의 목사 14명이 

공산주의자들한테 끌려가서 


그 중에 12명은 총살을 당하고 

2명은 살아서 돌아왔다. 


(숫자가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귀찮아서 안 찾아봄)


살아서 돌아온 1명은 

총살 현장에서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가버렸고, 


다른 한명은 신목사라는 분인데, 

정신은 멀쩡하지만 건강이 좋지가 않다. 


평양 시내의 교인들은, 

살아서 돌아온 신목사에게 


총살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총살을 당한 목사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총살을 당할 때, 

어떤 태도로 얼마나 숭고하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말해달라고 하는데, 

신목사는 총살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인들은, 

다른 목사들은 다 총살을 당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살아서 돌아왔는가? 


라고 마치 신목사가 잘못한게 

있을거라는 듯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급기야는 신목사가 

죽음을 당한 목사들을 공산주의자한테 넘겨서 


그들이 죽은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데까지 이른다. 


그럼에도 신목사는 입을 열지 않는다. 

 

남한의 군인이 신목사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살아서 돌아온 이유를 


왜 말하지 않냐고 묻자, 

신목사는 교인들을 가리키며, 


- 저들은 진실을 알기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신목사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자, 

평양의 교인들은 신목사집에 몰려가 


문짝과 세간살이를 부수고 난동을 피운다. 

총살을 당한 목사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여기며, 


광기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한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에 몰려가서 


무릎을 끓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하는 등

엄숙한 행사를 치루기도 한다. 


흰빛의 광기!


광기도 흰빛이 있을거라는걸 

나는 소설 속에서 느꼈다. 


신목사는 그들의 난동을 피해 

피신을 하는데, 


평양에 진격한 남한의 군인이 목사들을 총살한 

빨갱이(소설에서 빨갱이라고 표현했다)를 


붙잡게 되고

빨갱이는 그날의 일을 진술한다. 


빨갱이는 윗선으로부터 

목사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도 그날 그 자리에서 

목사들을 죽일 생각까진 없었는데, 


목사들이 자기만 살겠다고 

양심과 체면을 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고 


참소하며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 

자기가 생각했던 목사들 모습과 너무 달라 


환멸을 느꼈고, 

순간 욱했고, 


그 바람에 

그 자리에서 총으로 갈겨 버렸다고 자백한다. 


죽이지 않은 이중 한명은, 


목사들이 비굴하고도 더러운 행태에 

자기처럼 환멸을 느껴 


그 자리에서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가버려 죽일 이유가 없었고, 


신목사를 죽이지 않은 건, 


살겠다고 발버둥치며

같은 목사들끼리 배반하고 


참소하는 다른 목사들과 달리 

총부리를 든 빨갱이들한테  


왜 이런 짓을 하냐고 

당당하게! 


맞서서 항의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일하게 예수님 믿는자로서의 모습을 보였다고. 


그래서 살려줬다고. 


그런데!

사실이 이러함에도, 


교인들은 죽은 목사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다가 순교를 당한줄 알고 있다. 


신목사는 죽은 목사들을 

공산주의잘한테 넘긴 가롯유다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단체로 몰려다니며

행패도 부리고 엄숙한 기도도 한다. 


그럼에도, 


신목사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 

전쟁으로 혈육이나 동네 사람들이 죽는 아수라장에서, 


하나님을 의지해 현실을 견디는 

저들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고, 


죽은 목사들은,  

예수님 믿는 자의 엄숙하고도 


꼿꼿한 순교를 한걸로 

남겨둬야 한다고 여기는 뉘앙스의 말을 하며 


교인들의 행패를 묵묵히 견딘다. 

소설은 여기까지 읽었는데 


작가가 앞으로 신목사를 

어떻게 끌고 갈지는 모르겠다. 


또다른 반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여기까지 읽은 바로는, 


나는 교인들이 신목사에게 

총살 현장에서 있었던 사실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실상 그들은 

진실을 알고 싶은게 아니라, 


순교자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교자가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구심점이 되어 


암울한 전쟁통을 지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고, 


전쟁으로 인해 내면에 음산하게 

응축되어 있는 불안한 에너지를 폭발할 대상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래서 진실과는 상관없이 


죽은 목사들은 순교자로 만들고, 

살아서 돌아온 신목사는 가롯유다로 만들었는지도. 


신목사가


- 그들은 진실을 알기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 말에서 보듯이 

신목사도 나와 흡사한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신목사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롯유다로 취급받기로 작정을 했는지, 


그들을 불쌍하다고 하면서, 

입을 다물고 모든걸 견뎠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신목사 안에 

엄청난 사랑이 있다고 여겼고,


그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여겨졌고, 

이즈음엔 신목사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당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순교를 한건 아니지만, 

신목사가 바로 순교자같이 여겨졌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느라 


오해를 받아도, 

모함을 당해도, 


무시를 당해도

모욕을 당해도 


굳이 밝히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자들이 

바로 순교자가 아닌가 싶어지기도 했다. 

 

순교를 한 영혼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한다고 한다. 


자기안에 있는 모든 감정들을 다스리고, 

자기 자신을 다스림으로써 영적으로 전체를 장악하는 걸 


나는 왕노릇이라고 이해한다. 

전체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쓰면,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당한자-는,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을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느라, 


어떤 오해나 핍박이나 모욕을 

당해도 자신을 죽이고 참는 자(목베임)로 이해하고, 


이런 자는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마음을 통치하며, 


자신 주변의 영적 흐름을 장악한다는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천년동안은

영원보다는 짧지만 꽉찬 시기다. 


...내내...


요한계시록 말씀을 본다.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 요한계시록 20장 4절 - 


-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를 받지 아니한 자들-


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도 있는데 

나중에 써아겠다 싶으면 써야겠다. 


나는 항상 순교하고 싶다. 

근데 잘 안된다. 


그래도 순교해야 한다!

날마다 순교하자!


소설속 신목사처럼!

그리하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한다!


신목사는 교인들에게 

시달려도 내면에선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고 있었을거라고 여겨진다. 

소설, 결말이 궁금해진다. 읽어야겠다.  


(반전이 있을래나 모르겠다. 

신목사가 사실은 나쁜이라는 반전은 아니겠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고린도 전서 15장 31절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갈라디아서 2장 20절 - 


예수님, 


내가 읽는 책으로, 

내가 보는 그림으로, 


내가 관람하는 영화로, 

내가 듣는 음악으로, 


예수님 말씀을 더 느끼고 싶고 

그것을 통해 전하고 싶은데, 


소망이도 아프고, 

시간도 없고, 

 

사고의 논리성도 없고

통찰력도 없고

 

글을 다듬는다가

다시 보고 싶지도 않고

 

오늘 밤엔 요한이와

공짜 강좌 들으러 가야 하고


 잘 안되네요. 

주께서 읽는 자의 마음을 움직여 주실줄로 믿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참!

 

예수님.

소망이 좀 오래 살게 해주세요.

애가 아파요.

 

끝입니다. 예수님.

오늘 끝.